남성들의 이야기 (한국의 여성, 젠더 그리고 남성성의 구조)


일레인 H. 김, 최정무, 「남성들의 이야기」, 『위험한 여성-젠더와 한국의 민주주의』, 삼인, 2001

   이 글은 한 재미동포 교수가 1987~88년, 2년에 걸쳐 실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며 생활하는 남성들이 여성 그리고 남성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던 듯하다. 그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꼭 여성들에게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도 여성들은 자신의 힘과 권한을 박탈시키는 태도와 관습에 맞서 자기들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남성들을 잘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 글은 그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서울에 거주하는 24세에서 69세 사이의 기혼 남성 54명과 심층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에 응한 남성들을 크게 세 개의 사회경제적 범주로 나누어 보았는데, 월수입이 300만 원 이상인 사람들은 ‘상류계급남성’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하류계급남성’으로, 그리고 그 두부류에 속하지 않는 남성들을 ‘중류계급남성’으로 분류하여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공통된 질문 몇 가지는 빼놓지 않고 했지만, 인터뷰 내용이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밖에도 모든 남성에게 공통으로 물었던 것은 첫 번째 성적 경험이 어땠는지, 어머니나 아내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하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많은 남성이 젠더 혹은 여성에 관한 인터뷰를 성(sex)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남성 대부분이 노골적인 여성 혐오적인 태도를 드러냈으며, 그 태도의 근원에 한국사회에 가부장제도가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가 보여준다고 판단하였다. 그녀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터뷰에 참가했던 어떤 암 센터의 병원장인 Y박사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박사는 “유전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게 되어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물학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남자들의 견해는 전통 유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연장시킨 것이 아니라고 그녀는 보고 있다. 오히려 남성 지배를 유지하고 공적인 영역에서 남성을 도와줄 조력자로서의 여성을 옹호하고 지지하려는 현대적 차원의 전략을 구사하기위해 유교적 가르침을 재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른바 ‘남성답다’ 혹은 ‘여성답다’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데, ‘남성답다’라는 말은 집밖에서 지니는 지위, 즉 얼마나 돈을 잘 버느냐 못 버느냐 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반해, ‘여성답다’는 여성이 ‘집안에서’ 가계를 튼튼하게 잘 꾸리고 아이들을 잘 돌보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사회적 권력은 공적인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남성들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여성은 본성적으로 ‘남성다움’으로부터 배제되었으니, 여성이 사회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여부는 권력을 지닌 남성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남한의 근대화는 군대, 정부, 그리고 산업이 맞물린 관계위에서 이루어졌다. 그 속에서 ‘신의’라는 전통적인 유교덕목은 재구성된 것처럼 보이는데, 즉 모든 위계질서는 남성들의 공고한 유대를 중심으로 한 관계망에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여성이 등장하는 부분은 술과 관련된 ‘직업여성’에게 접대를 받을 때 남성들 사이에서의 동지애의 한 부분으로만 등장하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어머니로서의 여성과 아내로서의 여성을 다르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은 굉장히 이중적인 태도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항상 희생하여온 존재였으므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아내로서의 여성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한 여성에 대한 과도한 존경은 그 사람처럼 되지 못하는 다른 여성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기도 한 것이다. 또한 결혼과 사랑 그리고 섹스를 따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뚜렷이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내와 애인정도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애인은 아내가 될 수 없었다. 남성들은 돈을 주고 산 여성과의 성관계를 ‘혼외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관계는 단지 스포츠나 ‘오락’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으로 이혼에 다다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정생활을 잘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외도는 도움이 된다고 보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남성들의 외도문제는 아내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보기도 하였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는 계급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의 젠더관계를 파악할 때 계급관계에 따른 파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유층 남성들은 뻔뻔스럽다 싶을 정도로 가부장적인면이 있다는 사실이 인터뷰를 통해서 드러났다. 자기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가정에서 자기의 아들들을 잘 양육할 수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을 원하였고 그녀가 굉장히 순종적으로 가정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면 중간계층의 남성들은 회사에서 남성들 사이에서의 신의와 유대라는 측면 때문에 경쟁회사에 맞서 이겨야한다는 끔찍한 경쟁 상태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성적인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과로로부터의 위안을 아내로부터 얻기를 원했다. 마치 어머니처럼 자기를 위로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가사를 능숙하게 잘 처리하고 아이들을 잘 돌보며 시집 식구 등과의 가족관계도 매끄럽게 풀어내면서 가정의 경제 상태를 유지 및 확대시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를 바랐다. 이것은 부자가 원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이 원하는 것 둘 다를 원하는 것이었다. 이 안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영역구분은 확실하게 진행되었는데, 남성들의 외도는 종종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남성이 스트레스를 풀고 돈벌이를 더 원활히 하고자 이루어지는 남편의 외도는 가정의 유지와 생활을 위해 남편이 아내를 위해 무릅쓰는 희생행위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남성성’은 돈 버는 능력에 의해 측정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가난한 남성은 ‘남성’이 될 수 없고, 그들의 아내도 역시 ‘여성’이 되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 남자와 여자사이의 영역구분은 이 계층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여성은 남성못지 않게 격한 노동조건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심지어 어떤 빈곤층 남성의 경우, 여성이 돈을 벌어오고 남성이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그런 경우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빈곤층 남성의 경우, 부유층 여성에 대한 분노가 심했는데, 그것은 부유층 여성의 경우, 단지 돈을 잘 버는 능력을 가진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남성들의 이런 반여성적인 태도와 사고를 일정부분 여성들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적은 수이지만, 남성들과의 인터뷰가 끝난 후에 진행된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분석해보면 남성들을 단결시켰던 가부장적인 태도와 관행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들이 서로를 반목시키고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빈곤층 여성들에게 부유층 여성이냐 부유층 남성이냐의 성차이는 수긍하느냐 분개하느냐의 태도차이로 나뉘었는데, 그것은 빈곤층 남성들이 부유층 여성을 볼 때 들었던 생각과 똑같은 원인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여성들 사이에서의 계층 간 반목은 일제 식민지 이후에 계속된 사회적 불평등과 유교전통이 결합하면서 계속 진행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젠더, 연령과 계급 같은 위계질서가 어머니, 아내, 첩, 정부 또는 ‘직업여성’ 상호간의 반목을 조장했던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젠더에 따라 역할과 관계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남성들에게 부드럽기보다는 자기주장이 강한 면모를 기대하였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이런 남성상에 불만이 많았다. 일부 여성은 한국 남성 전체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는 여성이 결혼과 남성에 거는 기대가,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밀려온 할리우드 영화와 TV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인터뷰한 많은 여성, 아내 그리고 ‘직업여성’들은 한결같이 남성들에게 친절한, 이해심 그리고 대화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호스티스 일을 하던 K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친절하고 이해심 있는 남성이 좋아요.”

  S씨는 한국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가 급격하게 변화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요즘 들어 남편들이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국에서 남녀 간에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분명 예전보다도 좀 더 여성의 인권이 강조되고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형식적인 이런 변화가 실제적인 남녀평등을 보장해주는데까지는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적인 내용까지도 그러한 완벽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러한 인터뷰가 이루어진 지 8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그 8년의 시간동안 많이 변화하였고 성역할과 성별관계에 관련된 것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분명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 주변에는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처녀막 재생수술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한국의 남성성이 여성을 경멸하고 여성을 타자로 만들어 통제하려는 태도에 기초하는 한, 현실적으로 남성들에게서 여성이 갈망하는 따뜻함이나 친절, 이해를 얻어낼 수는 없다. 남성들은 자신의 가치를 돈을 버는 능력을 가지고 평가하는 아내들의 지위와 기대에 부응하고자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벗어나 순간적인 위안을 구하기 위해 그것이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호스티스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연민의 미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성간의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또 다른 술 문화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양성간의 평등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남성주체들을 고발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젠더가 이용되게끔 만드는 상태에 대한 고발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성과 여성 양자를 위한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착취적인 위계질서나, 여성을 배제하고 상품화하는 일이 없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개별적인 남성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종류의 남성성을 창출해 내어 승인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국가, 그리고 그렇게 실행되도록 성적 차별을 요구하는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는 에너지로 변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목표는 남성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구하는 것, 그것을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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