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법과 하나님법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세상법은 행위만 보지만 하나님법은 그 의도도 같이 보신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4복음서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이 있어요.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저도 나름 대한민국의 공교육으로 석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어떤 도덕선생님도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죄가 된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고전소설 레미제라블을 보면 세상법과 세상사람들은 장발장이 빵을 훔친 그 행위만 봅니다. 하지만 재판관이 하나님이시라면 장발장이 굶주림에 지쳐 빵을 훔친 의도도 같이 보실 것 같아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아닐까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세상으로 쫓겨난 이후로 장남으로 가인을 낳고 차남으로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은 초원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초원에서 양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생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행위만 보면 그 아이러니를 풀기가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당뇨가 있으셔서 탄수화물이 들어간 글루텐을 피하신 걸까요? 아님 육즙이 풍부한 양고기 육식을 즐겨하셨기 때문일까요?
이것은 저의 100% 뇌피셜이지만 아마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의 의도를 보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 물론 행위를 안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벨이 집에서 똥꼬 긁으면서 드러누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마음만 먹었다면 그것 또한 받으시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벨도 충실한 행위로 제사를 드렸지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교회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번씩 해요.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까 하는 생각이요. 물론 자기의 복을 바라는 기도를 하는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자기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그것의 합격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죠. 정말 자기가 재개발 토지수용 보상금을 받기를 원한다면 또한 그것의 성공적인 수금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말 자기가 간절하게 비트코인의 떡상을 바란다면 그것 또한 간절히 기도함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그것만의 목적만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은 거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것이거든요. 자기의 노후생활을 위해 자식을 키웠던 어떤 나르시시스트처럼 말이에요. 가인은 아마 자기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제사를 드렸던 것은 아닐까요? 만약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을 물어보고 이 블로그에다 기록해두고 싶네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까지도 같이 보시고 용서를 해주세요. 그런데 우리는 타인을 행위만 보고 정죄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만 보지않고 그 의도까지 같이 헤아려주신다면 우리도 타인을 행위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의도까지 헤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의도를 과연 알 수 있을까요? 아마 그걸 알아낼려면 관심법을 써서 마녀사냥을 해야할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참 남의 잘못을 정죄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상황들로 인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던지 아니면 정죄함을 받았다던지 해서 교회를 떠나신 분이 혹시나 이 블로그를 보실까 싶어서에요. 주님은 당신의 의도를 보시는 분입니다. 당신이 만약 정죄함을 받았다면 그건 의도를 보시는 하나님의 정죄가 아니라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